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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선대회장 '자동차는 피' 반백살을 바라보는 '꽁지 빠진 닭 포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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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9 11:25

정주영 선대회장 '자동차는 피' 반백살을 바라보는 '꽁지 빠진 닭 포니' 탄생

대한민국이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게 된 건 1960년대 초반부터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자동차공업보호법이 시행되면서 해외 선진 업체와 제휴를 맺고 부품을 공수 받아 자동차를 생산하게 된다. 그 시절 조립 생산은 국내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전기를 열었으나 외국 기술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당시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최고 시속 200km/h를 넘는 스포츠카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정주영 현대차그룹 선대회장은 1940년부터 정비소를 운영하며 자동차의 구조와 기계적인 원리를 터득했다. 그는 독립을 맞이한 이후 현대차그룹의 뿌리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현대자동차는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 필요와 정주영의 비전이 맞물린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경제 발전에 맞춰 중장거리 운송량이 늘어나면서 철도 수송에 한계가 생기자 정부는 2차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고속도록 건설을 적극 추진했다. 현대자동차공업사에서 축적된 자본으로 설립된 현대건설은 국내 도로 확충의 상당 부분을 맡아 진행했는데, 이때 정주영은 자동차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상했다.

정주영 선대회장 '자동차는 피'=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하며 도로는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그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정주영은 자동차 회사 포드(FORD)가 한국 진출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빠르게 움직였다.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은 물론 정비소 운영으로 자동차 지식에 해박한 정주영과 포드와의 제휴 협상이 빠르게 이뤄져서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됐다. 

이듬해 현대차는 울산에 조립공장을 짓고 영국 포드의 코티나(Cortina) 2세대 모델을 들여와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력으로 설립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자동차 회사가 공장을 짓고 조립 생산을 시작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현대 코티나’는 경쟁 모델인 ‘신진 코로나(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생산한 차량)’보다 큰 차체와 넉넉한 출력으로 이목을 끌었지만, 곧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힌다. 다른 택시에 비해 코티나 택시 차량이 자주 고장이 난다는 것이었다. 승용차의 대부분이 영업용 차량으로 운영되던 시절인 만큼 큰 문제였다.

그런데 포드가 파견한 조사단은 난감한 결론을 내렸다. 고장 원인을 ‘차를 험하게 굴리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비포장도로에서 운행을 자제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코티나는 선진국의 도로 사정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도로 포장율이 20%정도였으니 차가 멀쩡할 리 없었던 것이다.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나라에서 포드 조사단이 제시한 해결책은 ‘자동차를 운행하지 말라’라는 말과 같았다. 현대자동차는 포드에서 조립 모델을 들일 때마다 독자적으로 품질을 보강하며 현지화에 온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체 기술력 없이 외국 기업에 의존하는 조립 생산자의 한계를 느꼈다. 우리나라 땅에 맞는 자동차에 대한 바람은 점점 간절해졌다.

비포장길 달리는 독자 모델 개발하라=현대차는 단순한 조립을 넘어 독자 제조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제휴사인 포드와 새로운 합작사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주요 부품부터 자동차까지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 포드의 생각이 바뀌는 사건이 생긴다.

범아시아 진출 계획을 세우고 있던 포드는 중국 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도요타의 행보에 따라 현대자동차와의 합작사 계약 이행을 계속 미룬 것이다. 1971년, 자본금 납부가 늦어지는 데다 주요 부품을 국산화하기로 한 약속을 철회하려는 포드의 태도에 결국 합작사 설립 협상은 결렬됐다.

선진 업체가 제시하는 불리한 조건에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이 거듭 실패하자, 이에 지친 현대차가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첫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그 당시 국내 업체 입장에서는 선진 업체의 부품을 수입해 조립 생산한 자동차를 판매하는 것은 큰 투자 부담 없이 이윤을 내는 안정적인 사업 방안이었으나,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모델을 갖고자 하는 현대차 의지는 굳건했다.

1975년 마침내 현대차의 첫 독자 모델 ‘포니(PONY)’가 시장에 출시된다. 현대차 설립 후 10년이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포드와 합작사 협상이 결렬된 후 독자적인 생산까지, 포니 프로젝트는 수많은 반대와 우려 속에서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우리나라 기계 공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생산이 100% 국산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정주영의 각별한 노력과 빠르고 담대한 결단으로 ‘포니’가 탄생한다.

자동차 산업은 다양한 소재와 가공 기술이 접목된 종합 산업이다. 정주영은 자동차가 우리나라 기계 산업을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고 도전했다. 그가 전망한 대로 독자 모델 개발은 현대자동차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한 계기이자, 대한민국이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서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설립될 때만 해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불과 6만대 남짓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약 2,500만 대의 자동차가 등록되어 있다. 국민의 절반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스마트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인류에게 자유롭고 혁신적인 이동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로보틱스, 도심 항공 모빌리티 등 미래 모빌리티 영역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포니로 시작된 국가와 국민을 위한 도전 정신이 이제는 인류를 위한 진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디자인을 위한 거액 투자=독자 모델을 만들려면 타사 차량과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고유한 겉모습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기에 현대차가 고유 모델 개발 결심 후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국내 자동차 산업은 초창기 단계였고 신차를 디자인할 수 있는 인력은 전무했다.

현대차는 유럽 곳곳을 수소문해 차체 디자인을 해줄 회사를 찾던 중 이탈리아에 디자인 용역을 받는 회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현대차는 다양한 회사들을 검토해 최종적으로 ‘이탈 디자인(Ital Design)’을 선택한다.

이탈 디자인은 1968년 설립된 신생 회사였으나 창업자인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는 청년기부터 피아트의 다양한 차종을 비롯해 독일의 국민차 폭스바겐 VW 골프를 디자인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리던 30대의 젊고 유망한 디자이너였다.

주지아로는 설계 용역 비용으로 120만 달러를 요구했다. 다른 업체가 부른 금액의 두 배 가까운 비용이었다. 이는 차관을 얻어 자동차 공장을 지어야 했던 당시 현대차에 매우 부담되는 큰 비용이었다. 그러나 현대차는 주지아로가 협업에 열정적이며 더 풍부한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란 판단 하에 ‘젊은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선택한 것이다.

현대차는 1200~1400cc급 및 축거 2340mm 정도의 소형차를 원했고, 이탈 디자인에 미국과 같은 선진국을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이 적용된 차를 디자인해 달라고 요청한다. 1973년 10월 15일 주지아로가 스타일 스케치 4종을 완료했고, 정주영과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꽁지 빠진 닭’ 디자인이 선정됐다. 

주지아로는 당대 최신 스타일을 적용하여 감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소형차를 선보였다. 직선 기조의 스타일링은 당시 트렌드를 따른 외형이기도 했지만 제조 관점에서 프레스 금형의 난이도를 낮추는 모델 디자인이기도 했다.

모델 디자인이 확정된 1974년 2월 말, 설계 업무에 본격 착수하게 되고, 3월 15일부터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그해 10월 30일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하게 된다. 빠른 속도로 전개된 포니 프로젝트는 초기 디자인 스케치부터 프로토타입 제작 완료까지 약 1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고유 모델을 열망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이탈리아 자동차 공방의 장인 정신이 만나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토리노 모터쇼는 당시 가장 권위있고 규모가 컸고 그해 약 70만 명이 관람했다. 16개국 65개 회사가 차량 245대를 출품했는데, 포니와 포니 쿠페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화제가 되는 모델이었다. 두 차량은 세련된 디자인 및 당시 오일 쇼크에 따른 소형차 선호 트렌드, 더불어 한국 최초의 대량 양산형 고유 모델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세계 유수 언론의 특집 보도와 격찬이 이어졌다. 유럽 3대 일간지 ’라스탐파(La Stampa)’는 “한국이 자동차 공업국의 대열에 끼어 들었다”며 대서특필했고, 유수 해외 자동차 전문지들이 현대자동차와 포니에 대한 특집 기사를 발행했다.

중공업 불모지에서 자동차 수출국=포니의 국제 모터쇼 데뷔는 한 자동차 브랜드가 신차를 출품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종전 후 불과 20여 년 만에 각종 기간산업을 일으키고, 중공업 불모지에서 자동차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했으니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의 기적을 보여준 셈이다. 또, 국산 자동차 고유 모델 개발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까지 적극 동참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완성차 공장 건설과 수출 판로 개척에 있어 큰 동력이 된 셈이다.

포니가 고유 모델로 조명을 받은 것은 ‘대량 생산 체계’에서 개발되고 양산된 첫 ‘국산 고유 모델’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량 생산이 가능한 자국 브랜드의 고유 모델 기준으로 보았을 때, 당시 한국은 기존 8개 자동차 공업국(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 일본, 스웨덴, 체코)에 이어 9번째 고유 모델 출시 국가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이 국가들은 고유 모델을 수출한 ‘글로벌 모델’ 생산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고유 모델은 브랜드가 수출에 대한 의사 결정을 자주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포니는 국내에서 개발되어 한국인의 체격과 도로 사정에 적합했고, 조립 생산차보다 내구성이 좋으면서도 경제적인 것이 큰 강점이었다. 포니는 국내에 출시되자 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포니가 출시된 1976년 당시, 국내 승용차 판매 대수는 총 2만 4618대였는데 포니 단일 모델이 그해 1만 726대가 판매되면서 44%의 점유율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포니2가 출시된 1982년에는 국내 승용차 판매 점유율의 67%(포니1, 2 합산 기준)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포니는 출시 첫해부터 포니1이 단종되는 1985년까지, 약 10년간 대한민국 1위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대에 진입하면서 고도 경제 성장으로 구매력이 향상된 국내 소비자의 자가용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였고, 비교적 접근이 용이했던 소형차 포니는 국내 승용차 시장의 판도를 소형차 중심으로 바꾸었다. 포니는 국내 승용차 시장 성장을 주도하였고, ‘마이카’ 시대를 여는 핵심 주역이 되었다.

포니의 주요 인기 요인 중 하나는 높은 부품 국산화율이다. 당시 조립방식으로 생산된 차는 자주 고장 났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품이 수입품이어서 수리가 비싸고 오래 걸렸다. 반면 포니는 부품의 대부분을 국내 생산한 덕분에 수리가 빠르고 저렴했다. 또한 최신 시설에서 생산된 국산 부품을 통해 품질 수준이 향상되면서, 포드의 조립 생산자로서 낮은 내구성으로 비판받던 현대자동차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포니 부품 국산화의 진정한 의의는 국내 부품 업체 발굴과 계열화를 통해 국내 자동차 공업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포니는 당시 국내 기술 수준으로는 제작이 어렵거나 시장성이 낮은 일부 품목만 수입에 의존했을 뿐, 90% 이상의 부품을 자체 제작하거나 국내 부품 업체를 통해 생산했다.

이를 위해 현대자동차는 포니 프로젝트 계획 단계부터 부품 국산화 관련 목표를 세우고, 국내 부품 업체 현황을 조사, 발굴, 육성하는 데 자체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완성차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국 약 430개의 부품 업체를 발굴하고 계열화했다. 부품 업체는 포니 설계 도면에 따라 부품의 개발, 생산, 품질 검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은 외국에서 부품을 가져다 조립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 신차 개발 프로젝트였다.

포니는 해외 수출을 목표로 개발된 차였다. 국내 첫 출고 시점보다 보름 정도 이른 1976년 2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현대건설에 포니 15대를 시험 수출하였는데, 이는 현대자동차의 수출에 대한 높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해 7월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포니와 포니 픽업은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 1,019대가 수출되었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7,427대를 30개국에 수출했고, 1978년에는 1만 8,317대를 40개국에 수출했다. 수출 지역도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으로 지속 확대되었다. 현대자동차의 수출 성과에 고무된 정부는 1979년에 자동차 산업을 10대 수출전략산업으로 선정한다. 이후 1982년 7월에 포니는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누적 생산 30만 대를 돌파했는데 당시 수출 대상국은 약 60개국에 달했다.

포니를 통해 해외 수출 시장의 길을 닦은 현대자동차는 1985년 전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그해 세계 각지에 포니, 스텔라, 포니 엑셀, 프레스토 등의 다양한 모델을 수출해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듯 포니는 글로벌 시장에 수출되어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달리는 국기國旗’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현대차가 이후 다양한 라인업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김흥식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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